여행이라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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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나의 부모님은 나와 나의형제들을 데리고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셨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을 수도 있고, 좁은 집에서 난리법석을 떠는 우리3남매를 풀어놓고 싶으셔서 였을 수도 있다.그 당시만 해도 캠핑장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산으로 들로 강으로 어디든 달려가 텐트를 펼치면 그곳이 우리의 집이었고 별로 수놓아진 하늘을 덮으면 그곳이 우리의 잠자리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설날 마지막 밤, 나는 엄마에게 얼마나 간절히 기차를 타보는 것이 소원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우리는 그날 저녁 진주에서 목포로가는 마지막 기차에 올랐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못한다. 추운 겨울 새뱃돈으로 받은 돈을 긁어모아 그렇게 즉흥적으로 떠난 여행 머물곳을 찾지못해 기차역앞 여인숙에서 다섯가족이 서로를 부등겨안고 잠들었던 기억.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을 시작하셨다. 나는 방학이면 아버지를 따라 전국 방방 곳곳을 여행하였다. 나에게는 그 시간들이 빠르게 달리는 고속도로 옆으로 지나쳐가는 논밭을 바라보며 낭만을 꿈꾸는 시간이었고 전국의 국밥 맛집들을 찾아다니는 맛집 여행이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 해외여행을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100만원만 내면 한달동안 말레이시아에서 공부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 때 그 돈을 모으기 위해 나는 낮에는 학과 사무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밤에는 학교 앞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떠나간 말레이시아는 나에게 천국이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계를 마주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내가 걷는 걸음 하나 하나가 의미있었다. 모든 것을 다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 친구들은 그냥 떠나기 아쉽다며, 싱가포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말 점심 밥값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 싱가포르를 가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된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자신있게 다음에 가면 되지 라고 생각했을까,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싱가포르에 가보지 못했다.

사실 그런 후회는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오페어로 미국에 가서 2년을 사는 동안 나는 동부를 벗어나보지 못했다. 꿈의 도시라 불리는 LA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서도, 비행기 값이 부담스러워 못갔다. 캐나다에 있던 선배가 함께 쿠바에 가자고 했을 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일주일에 200 달러를 받고 일하는 나에게 쿠바여행은 사치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몇 해전 쿠바를 여행하는 연예인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모른다. 나도 저길 갔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후회는 이미 지나고 나버린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하면 아무리 후회해도 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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